2019년 7월 21일 일요일

7월 정치경제학연구모임 결과와 8월 모임 안내 드립니다.

1. 일시: 7월 20일 토요일 오후 3시-7시
2. 장소: 프닉스 연구실
3. 참석자: 최진석, 김장민, 김민정, 황정규, 최욱준, 정강산, 정윤광, 하태규 총 8명 
4. 주제
 가.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에 관한 해제(황정규)
  1) 발표내용
  - 첨부 파일 참조
  - 이 책을 낸 배경은 세 가지인데, 첫째, 여성 억압과 이에 대응하는 운동이 고조되는 현 정세를 맞아 사회주의자의 입장을 정리하는 것, 둘째, 지난 10년 간 페미니즘 문제를 여러 동지들과 논의하고 정리한 성과를 출판하는 것, 셋째, 월간지 <사회주의자>에 그 동안 기획 연재했던 글들을 모으고(80%) 나머지 글들은 이번에 추가하여 종합적 견해를 밝히는 것이었다.

  - 이 책의 목적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관점을 정립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여성 해방의 등식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지만, 페미니즘은 여성 해방의 한 특수한 방도일 뿐이므로,  제대로 된 여성 해방의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급진 페미니즘, 래디컬 페미니즘, 요즘 약칭 "래펨"의 한계는 극단적으로 가면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은 남성과 여성은 따로 살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한다. 남성과 여성의 적대 관계가 해소될 수 없고, 영원 불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래펨은 일반적으로 여성 억압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런 오류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여성 억압의 기원을 밝히고 여성 억압이 역사적인 것이고, 따라서 역사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런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에 대해 페미니즘을 비판하므로 반페미니즘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고 여성 억압을 해소할 올바른 방도를 제시하려는 것이기에 반페미니즘은 아니다. 다만 그 용어 자체를 새롭게 바꾸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급진 페미니즘은 가부장제가 모든 사회적 모순의 근본이라고 본다. 이것의 한계는 분명하다. 그래서 상호교차성 개념이 나온다. 다양한 모순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얽혀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00페미니즘"이라고 부르듯이 여성 억압이 모든 문제의 근본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는다. 이런 한계 때문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나왔다. 노동의 모순, 생산의 착취와 억압을 여성 억압과 병렬하며 결합하려는 시도인데, 이것도 앞으로 보듯이 이원론으로서 단순히 두 가지를 병렬시키는데 머문다. 이런 식으로 페미니즘은 어떤 수사를 붙이더라도 자본주의라는 근본,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을 설명하지 못하고 따라서 자본주의 폐절이라는 대안을 생각하지 못한다.

  - 책의 내용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부에서는 여성 억압의 기원을 밝혀야 이를 해소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질병의 원인을 알아야 치료가 가능하다. 증상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대증 요법은 한계가 있다. 페미니즘은 대증 요법과 같은 것이다. 여성 억압의 기원은 생산의 변화, 발전에서 찾는다. 엥겔스의 <가족의 기원>과 이후 최근까지의 인류학 연구 성과에 기대어 여성 억압의 기원을 밝힌다. <가족의 기원>은 수렵채집사회에서 혼인 형태의 변화(대우혼 등)를 중심으로 여성의 지위 변화를 서술하는 한계를 지니지만, 이후 계급과 여성 억압의 발생에서는 생산의 변화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수렵채집사회(이 용어도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의 성과인데)에서 (상설적이 않고 성과도 불확실한) 사냥보다 (안정적이고 성과도 확실한) 채집이 주요한 식량 공급 노동이었고 여성이 이를 책임졌으므로 여성의 발언권이 보장되었고, 남성과 여성의 평등이 보장되었다. 인간은 초기 농업사회에서 정주했지만, 아직은 괭이 같은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는 수준이어서 여성의 노동력이 중요했다. 그러다가 중농업사회로 넘어가면서 (농사 기술이 발전하고 쟁기를 이용하는 농법이 도입되면서), 근력을 더 많이 요구하는 남성의 노동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되면서 여성은 출생, 육아 등의 조건과도 결합하여 생산 노동에서 부차적 역할로 넘어갔다. 이것에서 즉 생산(조직 방식)의 변화, 성별분업(조직 방식)의 변화에서 (성별분업 자체가 아니라, 왜냐하면 원시공산주의 사회인 수렵채집사회나 초기농업사회에서도 성별 분업이 있었으므로) 여성 억압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더 많은 잉여 생산물을 남성이 차지하면서 사적 소유와 계급이 발생하는 과정과 동시에 일어났다. 그래서 엥겔스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를 논했듯이, 여성 억압과 계급 발생은 같이 일어났다. 이런 과정의 배경을 역시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 고든 차일드가 "신석기혁명"이라고 명명했다. 

 -  2부에서는 페미니즘의  주요 개념을 비판한다. "가부장제" 개념은 페미니즘의 근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의 한계는 초역사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 시작부터 가부장이 지배했다는 주장이다(따라서 인간 본성이 그렇기에 해결 방법도 없게 된다). 이를 대체하여 "성차별주의"(sexism)로 여성 억압의 이데올로기를 불러야 한다.  페미니즘은 또한 "가족임금제"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것이 남성 자본가와 남성 노동자의 공모 결과라고 주장한다. 역사적 분석을 하면, 가족임금제는 그런 공모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생존을 위한 투쟁과정에서 가족 임금을 쟁취한 결과로서 형성되었기에, 착취적이고, 여성억압적인 노동 현실에 대한 생존모색과 대응의 결과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가족임금은 여성 억압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사회재생산론"은 이원론이다. 이 이론은 최근 재 부상하면서 마르크스 6부 플랜을 이야기하며 마르크스가 노동에 관한 책을 안 썼고(논쟁적이지만 사실을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노동력 재생산 문제를 논의하지 못했으므로, 이런 공백을 사회재생산이론이 채우겠다는 것이다. 생산은 마르크스 논의가, 재생산은 페미니즘이 설명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회재생산이론은 생산이 곧 재생산이라는 기본적 원리를 오해하고 있다. 

- 3부에서는 기존 출판된 페니미즘 저서를 비평하는 과정을 통해 페미니즘이론의 한계를 보여준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 같은 책들이 많이 읽힌다. 비평을 통해 이들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2) 논평(김민정)

- 첨부 파일 참조
- 책의 논지에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추가적 내용에 대해 코멘트하기 보다 직접 읽어보면 좋겠다. 한 가지 언급할 점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같은 조류가 진보/사회주의 진영에서도 확장되는 이유는 결국 사회주의자의 학습 부족이다. 자아 비판이 필요하다. ===> 사회주의 페미니즘 개념을 변혁당 같은 진보/사회주의 전용에서도 수용하고 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이원론에 바탕하여 생산은 노동운동/사회주의, 재생산/여성억압은 폐미니즘이 해결한다는 절충에 머문다. 

3) 토론

- 계급 발생과 여성 억압 발생이 생산(조직 방식)의 변화와 맞물려서 발생했다는 엥겔스의 테제를 바탕으로 하는 서술에 대해 동의한다. 다만, 이런 설명은 추상 수준이 높은 것이다. 좀 더 구체적 수준에서 서술할 필요가 있다. 생산의 변화 차원과 더불어 잉여생산물의 확대와 사적 소유(개념)의 발생, 가족(관계 혹은 조직)의 변화 같은 차원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를 서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학술적 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 해방의 물적 토대를 만드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여성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 나아가 여성 해방이 실현될 수 있는 사회주의 토대에서 여성 억압을 어떻게 사라지게 할지에 대한 논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단편적이지만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여성 억압(가족 내 노예)이 다른 노예(계급)보다 가장 먼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예를 들어, "남성이 주된 식량 생산자 역할을 하고, 여성들은 집 안에서 임신과 출산, 육아를 주로 담당하는 식의 성별 노동분업은 여남 모두 사회적 생산 자체에는 동등하게 참여했던 이전의 분업과 달리 여성억압적 성격을 갖는다"(72쪽)는 서술은 추상 수준에서 맞는 이야기지만, 노동분업 자체가 여성 억압을 결정한다는 식으로 결정론적 서술로 오해될 수 있다.  이전(초기농업사회)까지 남성보다 여성 노동이 중요했음에도 (여성이 생산에 더 기여하고 잉여를 더 많이 낳는 노동분업)에도 불구하고 여성 우위, 남성 억압이 아니라 평등이 존속했던 사회였다면, 노동분업의 변화와 잉여 생산에서 역할과 중요도 변화 자체가 여성 억압을 자동으로 낳는다고 서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저자나 독자나 사적 소유 개념에 지배되는 지금은 당연하게 볼 수도 있는, 더 많은 잉여 생산 = 지배적 지위라는 등식이 공동 노동, 공동 소유 관념이 지배적인 당시 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이 책은 여성 억압과 여성 해방에 대한 대안적 서술의 출발점이다. 완성된 논의를 위해서는 같이 노력이 필요하다. 초기농경사회로의 이행, 신석기혁명은 짧은 기간의 혁명이라기보다 수천년의 역사였다. 이 과정에서 수렵채집사회에서 농업사회로 이행했던 사회가 북미에서 남미로 간 어떤 부족 같이 다시 수렵채집사회로 역행했던 사례가 있었듯이 다양한 과정, 다양성이 존재했다.  여성 억압과 계급 발생은 크게 보면 동시대 사건이었다는 것이지 구체적 역사 속에서는 다양한 복잡한 이행 과정과 경로를 거쳤을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내용에 동의한다. 가부장제가 초역사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현재 여성 억압과 관련하여 가부장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 실체를 역사적 과정을 통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필자의 논의대로 가부장제는 농업 생산의 기초 단위인 소농 가족(과 노예가 포함된 경우까지)에서 남성 가장이 생산조직에서 발생한 권위와 위계를 생활일반에 확장해서 지니고 가족을 지배하는 체제이다. 소농은 전자본주의 시대에는 보편적 생산조직 단위였지만, 자본주의에 와서는 생산조직의 단위로서(와 가부장제의 토대)는 해체되었다. 따라서 가부장제의 물적 토대는 자본주의에서 사라졌다. 다만, 자본주의 상부구조, 제반 제도는 새로 창조된 것이라기보다 이전 사회에서 존속한 것을 변형시켜 자본주의에 맞게 기능하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듯이, 가부장제라는 상부구조, 이데올로기도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착취와 억압에 봉사 역할을 하도록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된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다===> 여성 억압 이데올로기를 가부장제라고 부르는 것을 반대한다. 성차별주의 이데올로기라고 해야 한다. ===> 가부장제는 (페미니즘) 제2의 물결 시기의 중심 개념이었지만. 현재는 소수의 이슈라고 보인다. 연관된 좀 더 구체적인 이슈로서 여성혐오, 수치심, 모멸, 강간 문화 등을 다루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 가부장제가 현상적으로 소수의 이슈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급진)페미니즘 자체의 근본 개념, 고향 같은 것이다. 드러내 놓고 논의하지는 않지만 저변에 놓여있다. 따라서 이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이 필요하다.
- 사회재생산이론의 이원론 비판과 개념의 한계를 논의한 것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특히 생산과 재생산이 결코 별도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논의는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재생산논의 일반은 생산의 반복일 뿐인 재-생산 (re-production)을 별도 영역으로 오해하는 데서 출발한다.(지난 토론에서도 논의했듯이) 가사노동, 출산, 양육은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조, 지원하는 노동이지 재생산 노동 자체가 아니다. 다만, 이런 이원론 비판에서 나아가 노동력 재생산 문제를 서술하는 대안 논의를 제시하면 좋겠다 ===> 같은 맥락에서 재생산이론의 한계를 지적한 비판에 동의한다. 하지만, 사회재생산론이 다루었던 제반 주제들은 의미가 크다고 본다. 가사노동 가치논쟁, 인간 재생산 관련 출산, 양육과 관련된 억압 등의 논의들을 포용하고 분석할 작업이 필요하다. 이 논의들의 생산적, 긍정적 기여를 함께 보면 좋겠다===> 가사노동 논쟁은 다루려면 또한 별도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고, 이 책은 개괄적 논의, 출발점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다루지 않았다.  정성진의 논의가 있다.  가사노동 개념 자체는 타당하고 중요하다. 가사노동은 보조적 노동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는 가치를 생산하지 않지만, 사회주의에서는 더욱 중요해진다. 이 책은 사회재생산이론의 한계에 대한 문제 제기의 성격을 지닌다. 이에 대해 본격 학술 논의가 필요하다. 우리의 문제 제기를 받아서 학술 진영에서 발전시켜주면 좋겠다.  대체이론을 발전시켜 주면 좋겠다. 사회주의에서는 가사노동은 많은 부분 사회화되지만, 그럴 수 없는 부분은 부부가 공동 분담할 것이다. 여기에는 돌봄, 가사, 의료 사회화 같은 것이 포함된다. 이렇게 되면 여성은 감정을 속일 필요도 없고, 성을 거래 대상으로 삼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사회주의에서 여성은 더 낫게 섹스하는가>라는 책이 성립한다.  

-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사회주의 여성해방"을 이라는 문제 제기에 대해 미처 잘 몰랐던 부분을 깨우쳐주었다. 문제 의식에 공감한다. 다만 사회주의 여성 해방 이론은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에서 완성된 내용이 아니므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여성 억압에 대한 운동과 실천에서도 적극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 이런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대안적인 실천적 전략 논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페미니즘이란 용어의 한계를 인정할지라도, 페미니즘=여성해방과 등치하는 일반적 인식과 여성 억압에 반대하는 운동 진영의 인식 속에서 이들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 유사한 맥락에서 반페미니즘을 내거는 것은 문제가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운동은 기세, 시기, 주체가 있다. 어떻게 페미니즘 운동과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을 비판하지만 반페미니즘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대안 이론, 진정한 페미니즘, 다른 방식의 접근을 논하는 것이다.

-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 "부엌 없는 아파트"(북한), 트랜스젠더 수술 지원(동독) 같은 성과들을 소개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 그런 시도도 필요하지만, 이 책은 반자본주의 운동에 집중하려는 것이다. 사회주의 대안은 별도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 현재 여성 억압에 반대하는 운동과정이 활성화한 상태인데, 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려할 때, 책의 내용이 적합할지는 의문이다. 당면 이슈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운동과는 분리된 이론적 논의에 머무는 것 같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대한 입문서로서는 적합하지 않는 것 같고, 논쟁을 다룰 때는 도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페미니즘 운동에 적극적인 활동가들이 이것을 새로운 교재로 삼기를 원한다고 했지만, 그렇게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 유사한 맥락에서 이론적 접근이 이 책이라면, 당면 이슈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별도의 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렇게 이슈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 책의 개념적 논의에 접근할 수 있게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자체가 운동의 성과이다. 지난 10년 간의 운동을 통해 이룬 토론과 연구 성과이다. 올바른 이론, 개념을 목 말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당면 이슈에 대해 운동을 하다 보면 그런 갈증이 당연히 나온다. 이 책은 그런 갈증에 대한 대답이다. 페미니즘 입문서로서 이 책은  장기적 호흡에서 이론적 지형을 바꾼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 사회적 조건이 여성 억압을 규정한다는 측면에 대해 동의하지만, 생물학적 기제도 중요하다고 본다. 이 책은 그런 점이 부족한 것 같다 ===>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이 책은 생물학적 기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생물학적 결정론을 부정한다. 

- 현실 사회주의(혹은 실질적 자본주의) 불평등도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여성 억압에서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이 더 강하다. 그러므로 여성 억압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해방이론, 여성이론, 사회주의에서도 관철될 여성이론이 필요하다고 본다. 논평자는 이것을 생물학적 성을 극복하는 것에서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퀴어이론(사람의 성적, 젠더적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입장)의 관점이 타당하다고 본다. ===> 물론 독자적 이론이 필요하다. 사회주의가 실현되면, 여성 해방도 동시에 실현된다는 것이 아니다. 계급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화 혁명이 필요하다. 여성 억압도 극복하는 긴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생물학적 규정을 부정하는 퀴어이론이 아니라 문화혁명 이론이 필요할 것이다.

- 최근에 일인가구가 대세가 되고, (가족 도움 없이)자족적 재생산이 일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재생산과 복지에 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 토론을 정리하면, 마르크스주의 대안 여성(억압 서술과) 해방의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출발점이다. 앞으로 발전된 논의가 나오도록 같이 노력하면 좋겠다.

나.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에 대한 해제(최진석)
1) 발표 내용

- 이 책은 사회과학적 논의가 아니라 인문학적 논의다. 사실 일곡상 수상작이라서 이 책을 발표하길 권유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후의 저작인 <감응(affect)의 정치학>(감응으로 러시아혁명, 공동체를 보는 것에 관한 저술)이 이 자리에 더 잘 어울릴 듯하다. 그래서 발제문(첨부 파일 참조)뿐만 아니라 종합적으로 저자의 관점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겠다.
- 바흐친은 80년대 진보사회운동에서 루카치에 대한 대항마로서 한국에 도입되었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 등에서 알려졌듯이 정통 마르크스주의 미학을 제시한다. 하지만 엘리트주의라는 점, 민중적 문제 의식이 부족하다는 점이 한계라고 평가될 수 있다. 이것의 대안이 바흐친이었다.
- 바흐친은 80년대 영미권에서 소련의 이론가로서 르네상스의 대상이었다. 한국에서도 80년대 소개되었고, 90년대에 <문화과학>을 통해 관심의 명맥이 유지되었지만, 2000년대에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바흐친은 1895년 생으로 (루카치 1885년보다 10살 연하) 러시아 혁명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마르크스주의 언어철학>, <프로이트주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시학> 등의 저작을 통해 다성악 개념 등을 제시했다. 다성악과 같이 하나의 작품에서는 주인공 목소리, 하나의 주제 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목소리, 다른 목소리, 다른 주제도 있다는 점을 말하며, 따라서 작가가 저작권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 모든 창작물이 그렇듯이 기존 논의, 성과에 토대하고 추가하여 새로운 창조, 논의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모든 작품, 창작물은 작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이론적으로도 대통일 이론이 아니라 이질적 이론들의 접합이 모든 작품과 나아가 사물, 철학에 담겨있다고 본다.
- 스탈린 시대, 유배 생활 이후 문화연구를 통해 자기 철학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길을 택했다. 1930년대 박사논문으로 제출된 <라블레론>이 대표적이다.  이런 논의를 포스트모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등의 전거로 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다른 접근을 한다.

- 민중, 국민, 인민, 계급, 대중, 다중 개념들은 유사한 대상을 지칭하지만 경계가 다르고 따라서 차이가 있는 개념이다. 국민(nation)은 국가에 의해 호출된 개념이다. 인민(people)은 버틀러 논의가 좋다고 보는데, 자기 호명된 개념이다. 대중 등은 자유분방, 무조직성을 담은 개념이다.  그로테스크는 12, 13세기에 유럽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어원은 불분명하지만 그로타 (동굴)의 기괴한 벽화, 반인반수 등의 그림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 미학, 문화 논의에서 그로테스크는 기피 대상, 통제 불가능성, 좌우를 막론하고 억압해야 할 대상, 절제해야 할 부정적 형상이다. 민주주의도 데모스의 힘, 통치인데,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시사하듯이 데모스는 통제 불가능한 무리라고 볼 수 있다. mass, 대중도 분할될 수 있는 무작위 덩어리라는 의미다. 다중, multitude도 마찬가지다. nation과는 다르다. nation 바깥에 있는, 무정형의, 그로테스크한, 계급이나 민족의 근저에 있는 무리를 민중이라고 할 수 있다.

- 바흐친은 또한 <프로이트주의>에서 무의식을 부르주아 사회의 자기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정신분석학은 러시아혁명 초기에 유행했고 사회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었지만, 후원자인 트로츠키의 몰락과 함께 러시아에서도 배제되었다. 이런 조류를 반영하여 바흐친이 무의식을 비판하되, 버린 것이 아니라 다르게 살리고 접근하려고 했던 것 같다. 
- 바흐친은 <라블레론>에서 민중+무의식을 결합하여 현재를 전위시킬 바탕이라는 해석을 제시했다. 문화는 특정 지역, 시간, 생활과 사고방식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공통된 특색을 가진 특수한 문화가 된다. (보편 문화라기보다) 그래서 문화는 자의식, 의식적 경계가 생긴다. 타문화를 배척하게 된다. 그래서 다문화주의도 문제가 있다. 문화를 만드는 힘, 조직된 문화를 낳는 힘에 대한 연구와 논쟁은 러시아 혁명에서 중요했다. 문화혁명과 연관하여, 보그다노프, 레닌 등의 사회주의 문화 논쟁 같은 것이다. 결국, 절제된, 비형상적, 그로테스크적, 무의식적인 것이 문화를 만드는 힘이다. 문화 역시 구심적, 집중하는 것이다. 경계를 깨고 나가는 것, 다른 문화를 구성하는 혼돈, 파괴, 탈구 즉 반문화적인 힘이 선차적이다. 이것이 있어야 문화 구성이 가능하다는 것이 바흐친의 논의다.

2) 질의 응답과 토론

 - 민중과 인민을 구분해서 논의를 하셨는데, 두 말의 원어가 다른가? ===> 같다. 러시아어로 나로드이고 영어로 피플이다. 하지만 동일한 단어를 의미론적으로 변주하고 활용한 것, 의미론적 이중성을 지니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루소의 인민 주권론에서 인민은 창출된 것, 호명된 것이다. 마르크스의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도 마찬가지다. 바흐친의 무의식 개념이나 마르크스가 인도 식민지 지배를 찬양한 것이나 앞 시간에 여성해방을 논의한 것은 모두 의미론적 변주가 있다고 본다. 
- 국민과 인민은 정치학 법학적으로 보면 다른 개념이다. 국민(nation)은 집단으로서 주권자를 의미한다면, 인민은 같은 주권자이지만 개별적 주체를 고려한다. 반면에 대중, 군중은 사회학적 개념이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상퀼로트가 민중으로서 혁명의 주체였다. ===> 프랑스대혁명이 상퀼로트 민중혁명이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 성과는 부르주아가 쟁취했지만, 마찬가지로 새로운 혁명, 문화 발생의 힘이 민중에 있다는 것이 바흐친의 주장이다.

-  확립된 기존 민족 혹은 국가와 그로테스크, 대중, 반문화 혁명론을 대립시키는 것 같다. ===> 페미니즘을 보자. 10년 전과 달리 페미니즘의 거대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기존 문화의 경계 바깥에서 밀고 들어오는 힘, 주변화된 생성의 힘이다. 
- 바흐친에 대한 기존 연구는 어떤 상태인가 ===> 미국을 중심으로 소련의 이론가 중에서 발굴하여 발전시킨 대상이다. 바흐친은 소련 치하에서도 살아남았지만, 소련 보편주의 이념에 대해 긍정적 승인 역할도 했지만, 공산당을 부정하는 역할도 했다. 이런 점이 어필할 수 있었다. 문화, 문학연구를 중심으로 한국에서는 80년대 운동권에서 좀 더 순화하여 받아들였다. 다성악, 대화주의 같은 개념들로..
- 70, 80년대 한국의 민중문화운동, 민중이론에서 바흐친이 차지한 지위는 어떠했나? 바흐친이 출발점이었나? 바흐친은 하나의 추가적 참고사항이었나? 상관 없었나? ===> 유사한 질문인데, 법학에서 하위문화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과 연관은 어떤가? ===> 80년대에 루카치의 기회주의적 처신, 엘리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한국에 수입되었다.  1984년 창비의 <장편소설과 민중언어>가 최초로 출판되었다.  바흐친의 사상을 좀 더 풀어보겠다. 말, 언어에는 형식, 문법이 있지만, 파롤, 억양, 지역, 시대의 교집합으로서 말과는 다르다. 말은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말이 아니다. 타자가 사용하는 말을 사용해서 자신의 말을 구성하기 때문에 타자의 말에 의해 잠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은 소유할 사람이 없고,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 감응(affect)이라는 개념이 중요한데 노동자의 말과 따라서 의식도 잠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해방의 기획은 의식을 넘어서서 있어야 한다. 

- 바흐친의 사상이 현실 사회주의 비판의 내용으로 해석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현실 사회주의 비판보다 자본주의 비판과 새로운 주체를 형상화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동의한다. 이상화와 대립하는 방식인 이솝우화 방식으로 그로테스크한 것이 곧 생성이다.
- 바흐친의 민중은 중세나 르네상스의 민중인데, 이들의 반문화, 생성력을 이상화하고 찬양하지만, 냉정하게 이들은 무지하고 억압받고 착취받는 그 시대의 (자본주의 민족국가의 민족, 인민 규정과 같은 식으로) 봉건 영주의 농노 등으로 규정되거나 호출된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현존 문화를 비판하고 파괴할 동력을 찾으려는 시도는 좋지만, 이것을 과거의 복고에서 찾는다는 것은 러시아 인민주의(나로드키즘) 같이 한계를 지닐 수 있다는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 그런 측면이 있다. 하지만 스탈린 치하에서 민중의 원형을 복고적으로 중세시대에서 찾는 것은 의미론적 변용, 의미론적 이중성의 전략, 혹은 기획이라고 볼 수도 있다.

5. 8월 정치경제학연구모임 안내
 가. 일시: 8월 17일 토요일 오후 3시
 나. 장소: 프닉스 연구실
 다. 주제
  1)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의 지대론 비교연구(최욱준)
  2) 추가 신청 받습니다.
하태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