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8일 월요일

2월 정치경제학연구모임 결과와 3월 안내

1. 일시: 2월 16일 토 오후 3시
2. 장소: 프닉스연구실
3. 참석자: 강동원, 맹준규, 박지용, 정강산, 정윤광, 하태규 총 6명
4. 주제
 가. 마르크스의 방법, 관계와 형식으로서의 사회 분석(하태규)
  1) 발표 내용
  - 첨부 파일 참조
  2) 토론 내용
 - 인상비평을 하자면 삼각형 중에 한변만 다루는 것이 좋겠다 ===> 학술적 글쓰기에 그렇게 접근하는 게 맞을 수 있지만, 필자 입장에서는 이 분야를 계속 파고 들 생각은 없고 한 번의 글쓰기로 정리하고자 한다. 우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자는 입장이다.
 - 삼각형이 본인만의 주장인가? ===> 학계에서는 없는 것으로 안다. 실천운동 진영에서는 노동자연대가 이런 입장인데 구체적 내용이 어떤지는 잘 모른다.
 - 18페이지 헤겔 역사변증법에 관한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논리학>, <정신현상학>에도 역사변증법이 있지 않는가? ===> <논리학>에는 존재-본질-개념으로 구성되어서 그런 것이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신현상학>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그런 것 같이 생각할 수 있지만, 본문 각주에서도 밝혔듯이,  이런 변증법이 시간의 지평에서 발생하는 것은 맞지만, 이것이 과거 현실이라 상정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가상의 추상적 논의이고, <정신현상학> 전체가 알다시피 역사와 무관한 정신의 발생에 관한 논의이며, 마르크스 자신의 어떤 논의에서도  이 주인과 노예 변증법을 언급한 적이 없다. 80년대 마르크스주의 부활 때 꼬제브의 논의를 빌려 헤겔과 마르크스의 연속성을 논하며 주인과 노예 변증법을 강조했지만, 방금 논했듯이 역사변증법과는 상관 없다.
  - <철학사 강의>외에 헤겔에게 역사변증법이 없었다는 주장은 파격적이다. ===> <역사철학강의>에서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있겠으나 본문에서 논했듯이 전혀 변증법적으로 역사를 서술하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철학강의> <역사 속의 이성?> <법철학강의> 등에서 역사변증법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헤겔에 대한 일반적 인식에 비추어 논란이 될 수 있는 주장인 것은 감지했지만, 이 논문에서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었다. 어쨌든 <역사철학강의> 등을 검토하고 다시 입장을 정하겠다.
-bedingen, 규정한다는 개념과 관련하여 상호관계를 강조하는데 선뜻 동의할 수 없다 ====> 규정한다는 말은 bedingen이 아니라 bestimmen이다. 마르크스 역사유물론 테제에서 토대가 상부구조를 bestimmen 즉 determine, 규정한다는 말은 결정(decision making)하다로 잘못 번역되지만, 그 대상의 주요한 성질을 정하다는 정도의 의미다.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이런 토대의 상부구조 규정성이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이라는 점이다. 상부구조도 규정자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마르크스가 말하는 내용을 감안하고, 이미 역사유물론을 해석할 때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그 의미를 분명히 정리했다. 본문 역사유물론 테제에서 bedingen을 사용하여 마르크스가 의미를 분명히 전달한 것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약한다는 것, 주어진 범위 내에서 상부구조 변동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bedingen은 조건 짓는다로 변역하는 것은 독어 동사 bedingen의 두 가지 용법 중에 3격(영어 수여동사의 간접목적어)에게 4격(목적어)를 조건 짓는다는 방식을으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바로 4격 목적어를 (누구에게라는 3격 없이) 제약한다는 용법 중에서 첫번째 방식으로 번역한 것인데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즉 마르크스는 토대가 상부구조를 제약한다고 서술한 것이다 (토대가 어떤 대상에게 상부구조를 조건 짓는것이 아니라). 
- 소외론과 후기사상이 단절된다고 보는 것 같은 어떻게 그렇게 보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 알튀세 주장이 그렇다는 것이고 필자는 이를 반박했다
- real을 실재가 아니라 실제로 쓰는 특별한 이유,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는가?===> realism은 문학에서 사실주의, 정치학에서 현실주의, 철학에서 실재론으로 보통 번역하는데 특별한 의미 부여를 위해 추가적으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해석을 오히려 어렵게 만든다고 본다. 철학 방법론 관련  실제주의 정도로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 인간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알튀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이는데, 실천적 맥락의 의미가 있는가? ===> 구조주의를 비판적로 본다. 구조주의는 구조의 강고함만을 보기 때문에 마르크스와 달리 혁명에 대한 비관주의를 낳는다. 이것은 그람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의지의 낙관주의와 분석의 비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구조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보통 구조와 주체를 대립하여 완고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주체를 강화할 것인가의 이원론적 잘못된 문제 제기로 나타난다. 
- 관념, 형식을 강조하는 것이 어떤 정치적 기획과 연관있는가? ===> 이 문제야말로 별도 논문으로 전개할 내용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앞의 구조와 주체의 잘못된 이분법을 극복하는 것과도 상관있는데, 문제는 혁명적 실천 즉 구조, 형식과 자신의 동시 변경이다. 이런 형식은 사물의 형식일뿐만 아니라 사고의 형식도 포함한다. 6월항쟁, 촛불, 러시아혁명 등 모든 변혁운동에서 일시적 승리는 혁명적 열기가 살아있는 일정한 기간을 넘어서면 그 주체들이 새로운 국가, 정당 등 조직하는 과정에서 관료제, 위계제, 비민주주의(진정한 민주주의는 대표자 선출이 아니다)방식으로 하게 된다. 즉 이들은 사물의 형식과 동시에 사고형식을 실천적으로 바꾸는 작업, 자신들의 사회적 실천, 사회적 관계를 새로운 관계로 만드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낡은 체제의 관성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 본펠트의 논의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이부분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 그렇게 하면 논문이 더 산으로 간다. 마르크스 논의에 한정해야 한다 ===> 본펠트는 자율주의다. (소외와 실천을 중시하는 문제의식은 동일하지만 계급투쟁을 너무 강조한다는 점에서, 형식, 구조의 제약을 간과하고 실천이 형식, 구조를 통해 실현된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한계가 있다)
 - 방법이란 표현은 근세철학 "방법론 서설" 같이 사전에 정해진 방법이 있고 여기에 사물을 갖다 맞추는 식의 작업을 상정하는 것을 뜻한다. 헤겔부터 사태 자체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는 견해가 나왔기에 이런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오라려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 사상은 마르크스가 철학자였지만, 이를 극복하고 과학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적절한 용법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선택하지 않았다. 또한 이 글이 사상을 포괄하는 논의이지도 않다. 하지만, 방법은 사전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태 자체로 부터 나와야 한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이 글도 방법과 방법론을 구별해서, 마르크스에게서 작업을 통해 자신이 구현한 방법을 찾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일반화하는 방법론을 찾는 작업은 지적한대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다만, 마르크스 저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방법론이 아니라 이런 마르크스의 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을 강조하는 논의는 협동조합을 중시하는 개량주의로 흐를 소지가 있다. 논문에 반개량주의, 혁명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 혁명적 실천, 환경과 자신의 변화 일치가 마르크스의 핵심 견해이고 이것을 강조했다 
나. 맑스와 정의의 문제(강동원)
 1) 발표 내용
  - 첨부 참조
 2) 토론 내용
 - 분석적으로 마르크스 논의를 명료하게 대비시켰다. 그런데 저자의 주장이 1번 우드 테제를 지지한다고 했지만, 논의된 내용은 1번 테제를 제대로 옹호한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넘어선 것이다 ===> 본문에서 썻듯이 4번 테제가 양쪽을 다 부정하는 것인데, 이런 입장은 사실은 1번 테제와 동일하다.
- 이 논문에서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방식과 "정의"라는 시적 개념과는 마찰이 있어 보인다 ===> 여기서 논의하는 정의는 좁은 의미의 분배 정의로 한정한 개념이다.
 - 필자의 결론에 동의하기 어렵다. 후사미 입장이 맞다고 본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유통영역에서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분배하는 방식을 정당한 분배로 간주하는 의식을 만들고 규정하지만, 이것은 생산에서 착취, 억압, 예속을 위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불의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계급의식으로 보면, 지배계급 의식, 부르주아 의식은 이것이 정의롭다고 보지만, 노동계급의식,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반대로 볼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 이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이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 즉자적 계급이 대자적 계급, 혁명적 계급으로 형식변화할 때 가능하다). 역사유물론 테제에서 상부구조, 의식이 토대의 규정만 받는다고 보는 것은 경제결정론이다. 위기나 혁명국면에서 새로운 의식, 상부구조가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다.
  - 후사미 테제를 <고타강령비판>에서 첫째 국면의 노동에 따른 분배 논의를 가져와서 자본주의에 외재적 기준으로 자본주의를 재단하는 잘못된 방식이라고 보는 것 같은데, 이 노동에 따른 분배는 자본주의 비판에서 내재적으로 나오는 기준이다. 그래서 <고타강령비판>에서 이런 분배를 부르주아 권리, 평등이 원리와 실제가 일치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 고타강령비판은 분배 정의를 논의하는 개량주의 접근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혁명적 접근에 관한 논의인데, 분배 정의로 해석하면 안된다 ===>  자본주의 분배는 평균의 원리가 적용된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노동자는 동일 노동시간에 상품을 적은 량 생산하고 따라서 적은 분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더 생산성이 높은 노동자는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분배받는다. 이것은 시장에서 가치법칙이 동일한 노동시간을 다르게 평가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서 결국 평균시간의 원리, 최소시간의 원리를 노동자에게 강제하고 소외시킨다. 공산주의 첫째 국면에서 이런 가치형식을 지양하여 실제 노동시간에 따라 평등하게 분배하는 원리가 실현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공산주의 내에서 분배 정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구현된다는 것이다 ===> 정의당 같은 당명이 개량주의라는 것을 바로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해방, 자유로운 개성의 실현 같은 근본적인 것을 추구했다.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했지만, 더 유토피아 같은 원대한 근본적 기획을 마르크스가 말한다 ===> 필자가 논의하는 대로 분배 정의를 넘어서서 생산양식 변경이 마르크스의 핵심이라는 점에 당연히 동의한다.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 분배가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이것을 불의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기 때문에 안 할 뿐이고, 분배형식을 변형하기 위해 더 근본적인 생산양식의 변경을 논의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 자본주의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관점이나 투하노동설 같이 리카도주의 노동가치설 해석에 따라 물량 분배를 논의하는 관점을 비판하며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참신한 기획이라고 본다. 이런 문제의식은 알튀세주의와 연관이 있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의와 연관하여 공산주의에서 상상적 관계, 공산주의 정의가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 아니다. <44년 초고> 소외론의 관점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공산주의는 정의 같은 것이 필요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 
- 마르크스주의 전제 혹은 다룰 대상의 범주에 관해 다시 질문하고 싶다 ===> 마르크스는 사민주의자, 자본주의 개혁가들 같이 최저임금제 같은 문제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 근본적 생산양식의 변경을 바라본다 ===> 그렇다고 해도, 마르크스 방법, 관점에서 최저임금을 지지하면서도 그들과 상이한 관점에서 그것의 의미를 보고 제시한다. 총체성의 관점에서 모든 것은 상호연관이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사회적인 것에 대해 발언할 수 있고 해야한다.
6. 3월 정치경제학연구모임(안내)
 가. 일시: 3월 16일 토요일 오후 3시
 나. 장소: 프닉스 연구실
 다. 주제
  1)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무폐 저,  이승원 역, 문학세계사,  2019. 2)(이승원) 
  2) 신청 받습니다.

하태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