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0일 목요일

12월 정치경제학연구모임 결과와 1월 모임 안내

1. 일시: 12월 15일 오후 3시-6시반
2. 장소: 프닉스 연구실
3. 참석자: 김장민, 박0용, 정0산, 권오범, 정윤광, 하태규 총 6명

4. 주제
 가. 발터 벤야민과 마르크스주의(박지용)
  1) 발표내용
    - 첨부 파일 참조
    - 이 글은 한철연이 내년 2월 출간예정인 <20세기 정치사상>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한 장을 구성할 예정이고, 오늘 토론에서 나온 좋은 내용은 글을 개선하는데 반영하겠다.
    - 필자는 칸트로 석박사 학위를 했는데, 벤야민으로 연구영역을 넓히고 있다.

  2) 토론 내용
    - 벤야민이 마르크스주의를 전유했는데,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나오는 성좌(constellation) 개념이 중요한 것으로 안다. 이것과 알튀세르의 구조적 인과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토대 상부구조 관계와 관련하여 설명 바란다 ===>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뜬금없는 변증법이다. 파사젠 베르크(Passegen Werk,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그의 철학을 대표할 수 있듯이 핵심 개념이 몽따쥬로 표혐된다. 깨진 유리들을 모아서 만드는 모자이크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성좌이고 그것이 진리다. 

   - 벤야민은 "정지의 변증법"이라고 표현하는데, 혁명을 파국, 단절과 연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변증법은 운동의 개념이고 따라서 정지가 없는 개념이 아닌가? 그래서 정지의 변증법은 문학적 유비인가? ===> 역으로 변증법은 운동 중에 있으니까 멈춰야 한다.  벤야민은 19세기 파리, 모더니즘, 넝마주의, 노파 같은 이미지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모순을 다른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서울역의 거지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아우라 개념도 그렇다. 기술복제 시대에 아우라가 몰락했다. 이 결과 우리가 행복한가? 아니다. 모든 사람에 내재했던 행복했던 순간이 아우라다. 푸르스트에서 의식을 넘어선 어떤 "마들렌의 과자" 같은 것이 훅 들어온다. 푸르스트에게 행복한 경험은 이런 식으로 삶의 경험 외부(무의식)에서 나온다. 보들레르의 군중에서 충격을 체험한다. 보들레르를 나약한 쁘띠부르주아라고 비판했지만, 오히려 벤야민은 그에게서 자본주의 모순에 관한 통찰을 본다.

  - 벤야민의 사상을 메시아주의라고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비판한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 벤야민은 초기에 언어철학을 했다. 성좌, 아우라 같은 언어철학적 개념을 마르크스주의로 변용한 것이다.  오히려 그의 절친인 유대 신비학자 숄렘은 벤야민이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굴절되었다고 평가했다.
  -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개념이 현대 도시 설계나 도시 구성에서 중요한 이론적 자원이 될 수 있는가? 그런 논의가 있는가? ====>  벤야민은 도시를 계급 개념 없이 사람들로 묘사한다. 

  -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로 영화를 높이 평가했다. 연극 등의 전통적 부르주아 예술의 아우라가 사라진 대신,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영화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점을 주목한다. 그래서 영화의 해방적 기능의 가능성을 보았다. 물론 필자도 영화가 대자본에 예속된 사실을 지적했지만, 벤야민의 관점은 일종의 기술결정론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적 가능성이 아니라 이 가능성을 실현할 사회적 관계, 생산관계일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벤야민이 간과한 것은 아닌지? 필자나 학계의 견해는 무엇인지? ===> 영화자본에 투항한 것은 맞지만, 교환가치를 비판하고 상품생산체계를 비판하는 차원과 달리, 예를 들어 피규어를 상품이 아니라 자기세계를 구축하는 사물로 사람들이 사용한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기술매체의 해방적 가능성을 늘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 같은 맥락에서 필자도 언급하였지만 온라인과  SNS 같은 새로운 매체의 해방적 가능성을 주목하자는 주장이 가능할 것 같은데, 이 문제는 토론 주제일 것 같다. 토론을 위해 한 가지만 짚는다면, 과거 노무현 집권 전후하여 시민운동과 민주당 세력이 최초로 온라인과 SNS를 활용한 여론전을 (음모적으로) 전개했고 성공했다. 하지만, 우파들은 이에 대응하여 자본의 힘과 국정원 같은 권력 조직을 활용하여 더욱 체계적으로 SNS를 활용하여 여론전을 했고 승리했다. 최근에 60 70 세대에 보수세력이 유튜브로 먼저 접근하는 것이 이것의 연장이다. 즉 기술매체는 해방의 가능성도 주지만 잠재적일 뿐이고 이것을 실현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이다.===> 결국 광화문 촛불운동으로 승리했다 ===> 하지만, 부르주아 정권교체에 불과했다. 한국사에서 한 번도 민중이 승리한 혁명이 없었다.  이것이 기술매체 활용론의 한계를 보여준다.

 - 벤야민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역사유물론의 한계를 정치 신학이라고 표현한 신학적 요소로 보완하자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신학의 어떤 요소가 역사유물론의 어떤 요소를 보완한다는 의미인지 설명해달라 ===>  혁명에는 모티브가 필요하다. 내적 모순 만으로 안된다. 혁명은 인과적 구조 때문이 아니라 신학적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베야민의 입장이다 ===> 일면 동의가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종말론적 요소가 있다. 이런 것 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 벤야민은 종말론 같이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본다 과거에 상처받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투쟁을 통해 해방의 계기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 이해가 되지만, 이런 역사유물론을 보완하는 계기가 신학일 필요는 없다. 인간주의 같은게 필요하다 ===> 마르크스주의를 종말론이라고 보는 것은 반대한다.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post Marx Marxism), 엥겔스부터 시작된 마르크스주의는 그럴지 몰라도 마르크스 자신의 마르크스주의는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에는 아래로부터 노동자해방 사상, 인간의 자기변혁의 실천사상(포이어바흐 테제 등)이 있고 그것은 민주주의로 연결된다. 이것이 역사유물론의 객관주의 틀의 한계를 진정으로 해결하는 열쇠라고 본다. 

- 신학과 봉기론이 연결된 사례가 있는가? ===> 레뷔가 설명하듯이, 밴야민은 구원적 해방의 사상이다. 20세기 혁명을 보면 원한의 감정이 바탕이 된다. 독일에서는 사민주의가 이것을 죽였다. 
- 블랑키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 블랑키주의는 봉기우선주의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 조건이 도래할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꿈과 행동의 연대 관점에서 봉기가 중요하고 이것을 벤야민이 높이샀다.

나. 구드윈 성장 순환 모형으로 살펴 보는 한국의 기능적 소득분배(권오범)
 1) 발표 내용
  - 첨부 파일 참조
  - 이것은 수학자인 공저자와 협동으로 만든 연구성과이다.

 2) 토론 내용
  - 1997년 이후 소득분배가 악화되는 것으로 나온다. 이것을 추가로 연구할 것인가? ===> 2016년까지(공동 연구를 시작한 시점) 자료를 포괄해서 연구했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 출범이후 자료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글이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소득(임금)주도성장론이다. 큰 틀에서 취지는 동의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디테일에서 달라진다. 결론적으로 임금주도성장이 가능하려면 노동의 힘을 증대시켜야하는데, 현 정부는 그럴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 소득주도 성장과 관련하여 자료분석을 하니까 개선되고 있다는 것인가? ===> <그림 5>에서 보면 87년이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임금성장에 따른) 노동소득분배율을 증가와 취업률이 동시에 늘어나는 1사분면이 나타난다. 이것이 임금주도성장의 모습이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후에는 2사분면, 3사분면으로 가면서 노동소득분배율이 악화되고 취업률도 증가 혹은 감소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 구드윈 모형의 가정에서 이윤이 전부 저축과 투자로 사용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지 않는가? 수요와 공급이 일치한다는, 마르크스가 이미 비판한 세이의 법칙에 근거한다 ===> 단순화를 위해 모형화한것이고, 실제 투자율을 계산하여 반영한 연구도 있다. 대략 0.7 즉 70%가 투자된다.

  - 노동소득분배율도 상승하고 실업률도 하락하지 않는 국면은 루스벨트 시대였던 것 같다 ===> 구드윈 모형은 노동소득분배율과 취업률이 별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상관있다는 가정에서 모형으로 실제 경제를 평가한다. 대략 15-20년 주기로 1사분면부터 4사분면까지 원을 그리듯이 노동소득분배율과 취업률이 상관관계를 유지하면서 변화한다.  마르크스는 사실상 이윤주도성장을 가정했고 임금주도성장을 가정하지 않았다. 구드윈은 주류경제학적 방법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데, 임금주도성장이(1사분면)이 가능하지만, 특정한 조건(노동의 힘이 강할 떼, 즉 계급투쟁이 승리할 때)에서 가능하지만,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지속가능하지 않고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 구드윈의 모형은 실물 텀으로 자료를 분석한다. 하지만 이것은 가치 텀을 배제한 것이라서, 가치 텀으로 문제를 보면 수치가 달라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가치론에 관한 tssi(시점간단일체계해석)이 강조하듯이 1981년부터 2016년까지 물량텀으로 10개가 성장했어도 가치텀으로는 (가치가 상품을 반복(재)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므로) 그대로일 수가 있다 ===> 물론 가치텀으로 보면 수치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저자인 수학자와 공동연구라는 한계 때문에 가치텀을 반영하는 연구는 무리였다. 다만 그리스 학자가 실제로 가치텀으로 구드윈 모델을 연구한 것이 있다. 언젠가는 이런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 구드윈은 적절하게도 노동소득분배율이 일정한 것(주류 경제학 가정)이 아니라 또한 일방적으로 하락하는 것도 아니라(속류 마르크스주의?) 주기를 가지고 순환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런 주기적 순환을 통해 장기추세가 나타날 것인데, 마르크스의 장기적으로 착취율이 증대된다는 해석에 따르면 하락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번의 주기순환이 아니라 장기추세를 여러 순환을 포괄하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피케티의 2-300년 실증연구가 단순하지만 이런 노동소득분배율 하락을 보여준다. 이런 연구를 할 의향이 없는지? 그런 기존 연구는? ===> 구드윈은 수학적 모델이기 때문에 평균 자체가 기간에 따라 달라진다. 상대적으로 높은 노동소득분배율 구간을 많이 포함하면 수치가 올라가고, 반대면 반대로 수치가 내려간다. 어쨌든 계급투쟁이 중요하다는 점을 제기한다.

  - 노동소득분배율 0.7-0.8이 현실적인 수치인가? 기존 잉여가치율 연구들을 보면 노동소득이 50%(김정주), 혹은 20-30%(정구현) 식으로 나온다. 이렇게 비생산적 노동의 임금을 얼마나 잉여가치로 포함하는지 여부에 따라 변화하지만, 대체로 다른 일반적 연구들도 노동소득분배율을 50-60%로 본다 ===>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구분하여 모델을 돌라면 분명히 다른 수치가 나올 것이다. 이 문제는 안 그래도 이후 연구에서 접근할 생각이다.

  - 다른 나라들도 이렇게 순환하는 주기로 나타나는가? ===> <표6>  OECD 10개국 수치를 비교했듯이, 오리지널 모형으로는 반드시 순환주기로 나타나지 않지만, 수정한 모델을 적용하면 대체로 그렇게 나온다.

  - 5쪽의 모델 설명과 이후 수학 공식들을 일대일로 매치시킬 수 있는가? ===> 각 사분면과 수학공식이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다. 다만, 그렇게 기울기가 반대로 변화하는 요인은 수학적으로 증명할 대상이 아니다. 이것의 설명은 계급투쟁을 포함한 정치경제학의 영역이다

  - 세이의 법칙을 적용하는 등 마르크스주의에는 맞지 않는 모델인 것 같다 ====> 물론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를 반영하지 않는 등 한계를 가진 모델이다. 하지만, 케인스주의 유효수요론에 입각하는 소득주도성장론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비판하는데, 구드윈 모형이 도움이 된다. 물론 (위기론에서 한 분야에 불과한) 이윤압박설의 관점을 취하지만, 1사분면에서 노동자 임금도 오르고 자본의 축적과 따라서 성장도 동시에 일어나는 선순환이 소득주도성장론과 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지만, 이런 선순환은 자본의 이윤이 (임금상승에 따라 결국) 줄고 투자가 줄어듦에 따라 결국 취업률이 하락할 수 밖에 없어서 2사분면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케인스주의 소득주도성장론의 순진한 가정을 논리적으로 격파하는 모형이다.

 - 그림 2의 한국은행 모형은 노동소득분배율이 0.58인데 비해 그림은 0.7-0.8 구간에 있다. 뭔가 이상하다 ===> 구드윈 모형과 괴리가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 그림 5의 한국의 1981-2016년의 36년은 평균 2회 순환이 발생해야함에도, 실제로 1번밖에 없다. 어떻게 된 것인가? ===> 결국 설명이 안된다고 해야 한다.

 - 2004년 이후 노동소득분배율 반등이 안일어 나고 결국 주기적 순환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 이 문제를 계급투쟁의 실패 내지 침체라는 관점의 마르크스주의로 설명해내야 한다고 본다 ===> 이 논문의 최대 장점이 1987년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노동소득도 늘고 취업률도 높아지는 선순환, 황금기가 (자본주의 내에서는 최대치) 가능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의 해석은 자본이 1987년 이전까지는 비유하자면 노동시간 연장에 기반한 절대적 잉여가치 착취에 근거했다면, 1987의 노동자대투쟁이후 더이상 그런 절대적 잉여가치착취가 불가능하게 된 자본이 생사를 건 기술혁신에 나서면서 상대적 잉여가치 착취를 체계적으로 구현하여 결국 세계 초일류가 되는 과정이 전개되었다. 즉 노동의 대투쟁으로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기정사실로 만들었기 때문에 자본은 자기살길을 위해 비상한 노력으로 기술혁신과 결과적인 성장의 선순환을 낳았다. 현재 소득주도성장론에서도, 필자가 강조하듯이, 정부가 노동의 힘을 강화하려는 자세가 중요한데, 그것이 없다는 점 그 점이 집권세력이 자본주의 동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 노동소득분배율의 하락 즉 2사분면으로 이동은 계급투쟁 하락의 결과인가? ===> 구드윈은 이윤압박설에 근거하여 이윤이 줄어서 투자를 못하고 그래서 취업율이 하락하고 노동소득분배율도 하락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5. 1월 정치경제학연구모임(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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