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2일 수요일

11월 정치경제학연구모임 결과(보고)와 12월 모임(16일 토)(안내)

11월 정치경제학연구모임이 아래와 같이 열렸습니다. 벌써 연말이 다가오고 있네요. 오는12월 16일 모임은 특별히 정치경제학과 동문회 송년회 모임으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안내 참고하셔서 다 같이 뵐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1. 일시: 11월 18일 토요일 오후 3시
2. 장소: 프닉스 연구실
3. 참석자: 정윤광, 홍영두, 김장민, 원영수, 하태규 외 총 8명
4. 발표: "68혁명/운동의 정치적 재해석의 현재적 의미(원영수/국제활동가)(첨부 참조)

가. 발표내용
 - 이 글은 1999년 쾰른, 시애틀 등의 반세계화 운동과 국제연대활동에서 만난 해외 활동가들에게서 받은 충격으로 스스로 구좌파에서 신좌파로 변화하면서, 특히 68혁명/운동을 새롭게 볼 계기를 얻었고, 이후 10년의 연구 끝에 2102년 정리한 글이며, 앞으로 기회가 되면 책으로 출판할 예정임.

- 이 글은 68혁명/운동을 문화적 해석, 문화혁명으로 해석하는 주류적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서 정치적 해석, 정치혁명의 관점을 복원하는 것이며, 탈정치를 재정치화로 바꾸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음.

- 방법론적 전제는 두 가지로서 1) 장기 60년대라는 관점, 즉 68은 60년대 전후 각 10년씩의 사전과정과 여파를 포괄하는 장기 60년대의 관점과 2) 구좌파와 신좌파의 구별 혹은 대립의 관점임.

- "실패한 혁명"이라는 평가는 표면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충격은 성공한 혁명보다 더 컸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음. 무엇에 실패했는지, 성공과 실패의 경계가 모호함. 요점은 68혁명/운동이 변혁 프로젝트의 출발점이라는 의미가 복원되는 것에 있음.

- 궤적과 의미: 월러스틴은 68혁명을 1848년 혁명에 비견될 의미를 가지는 유일한 혁명으로 평가한 바있음. 유럽 중심부에서 공간적으로 포괄성을 지녔다는 의미라고 이해함. 68은 전지구적 혁명/운동이었음.

   운동의 주체는 새로운 주체로 등장한 청년학생만이 아니었음. 프랑스 68년 5월사태에서 보듯이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중요하였고, "노학연대"가 최초로 제대로 이루어진 혁명/운동이었음. 러시아혁명이 인텔리겐차의 참여가 중요했지만 노학연대 차원의 발전은 없었음.

  구좌파가 방기한 가두투쟁과 현장파업이 중심이었고, 또한 1960년대의 노동자투쟁은 1930년대 선배들과 비교할 때 컨베이어 속도 문제를 제기할 정도로 작업장 내의 불합리한 권위에 도전한다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었음

  국제주의를 복원했다는 의미도 중요함. 베트남 전쟁 반대를 매개로 국제적 운동으로 진화했고 유럽과 미국은 물론 남미와 일본까지 동참했음. 68은 베트남전 반대운동으로 확산되었음
- 운동의 궤적: 1968년은 1월 베트남 구정공세, 4월 마르틴 루터 킹의 암살사건과 전국적 도시폭동, 5월 파리 라탱지구의 바리케이트의 밤, 8월 소련군의 프라하 침공, 10월 멕시코시티의 틀라텔롤코 학살사건까지 하루하루가 중요했음. 또한 앞서 장기 60년대로 말했듯이 68의 궤적은 50년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비판과 헝가리 민중봉기부터 70년대 후반 붉은여단과 적군파의 무장투쟁까지 포괄함. 70년대말 80년대초 대처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는 이에 대한 반혁명이었음.

- 주체의 구성: 지리적으로 미국, 서유럽, 동유럽, 제3세계를 포괄했고, 부문으로 학생운동, 노동운동, 당건설운동, 무장투쟁, 신사회운동, 정체성운동, 평화반전운동, 환경운동을 포괄했으며, 계급으로 중간층, 새로운 노동계급을 포괄했음.

 혁명/운동의 아이콘은 체게바라, 호치민, 마오쩌뚱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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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의 의의: 1) 혁명 불가능 논리를 격파하고 혁명 의제를 복원했음. 이 결과 구좌파와 신좌파의 관계가 역전되었음 2) 반권위주의와 민주주의를 심화 확장시키는 계기로서  직접 민주주의, 총회 민주주의 등을 대안으로 제기했음 3) 혁명의 의제를 문화로 확장했음. 예를 들어 교통신호 준수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개인적 자유를 실질화하는 문화가 형성되는 계기였음. 순응주의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의식, 자유로운 성과 마약 등이 등장하였음 4) 한 세대 전체가 대중적으로 급진화되었음 5) 국제주의가 부활했는데, 이제는 과거와 달리 풀뿌리 국제주의라고 할 내용을 지녔음 6) 냉전 하에서 당-노조 운동질서와 고전적 단계혁명론, 평화이행론에 대해 타격을 가하며 거부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계기였음.

- 장기 60년대의 정치적 의미:  68이 제기했던 정치세력화의 과제를 실현하는데는 실패했음. 당적 구조를 지향했던 마오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집단들은 소정파로 남았음. 1980년대에서야 서독 녹색당이 성과를 냈음. 나머지 대부분의 운동세력은 정치세력화되지 못하고 산개했음. 서구에서 가장 큰 좌파당이었던 이탈리아 구좌파인 공산당은 1991년에 신좌파의 의제를 수용해서 구좌파와 신좌파의 접합을 이루었으나 소련 붕괴와 맞물려서 결국 좌파민주당->민주당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구좌파에서도 가장 오른쪽으로 갔음. 이런 실패의 결과 문화주의적 해석만 잔존하게 되었음.

- 문화주의 해석: 노동자 없는 혁명이라는 주장은 68의 3대 사건인 파리 5월 사태와 1천만명 총파업, 이탈리아 69년 뜨거운 가을, 미국 70년 5월 학생반전운동 500만명 시위에서 두 가지가 노동자운동이었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음. 이런 노동자의 참여로 70년대에는 노동운동의 좌경화, 급진화가 진전되었음. 신자유주의는 이에 대한 반동이었음.

    지도자 없는 혁명, 자연발생적 혁명이라는 주장은 실제로 수많은 조직, 콘-벤디트, 마오주의, 트로츠키 주의 조직들이 상당한 규모로 조직적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무시함. 이탈리아 일 마니페스토 등에 대해서는 각주 18번, 미국 민주사회주의 학생회, 검은표범당, 새로운 공산주의 운동(NCM) 등에 대해서는 각주 19번, 독일 사회주의학생연맹 등에 대해서는 각주 20번 참조바람.

- 신좌파 무장투쟁: 각주 22번 참조. 국가탄압/국가폭력과 상호작용 과정에서 무장투쟁으로 발전했음.

- 문화주의 해석비판: 국가폭력에 대한 비판을 결여한 문화주의 해석의 문제점을 강조할 필요 있음. 문화주의 해석은 신좌파 운동을 이미지 소비품으로 사용하게 되었음.

- 신좌파 vs 구좌파: 서로 적대적 관계였고, 세대/문화 차이를 반영했음. 이탈리아 파솔리니는 신좌파를 중산층의 "버릇없는 자식들"로 표현할 정도로 문제의식이 부족했음.

- 신좌파의 정치세력화는 80년대 녹색당이후 성공하지 못했다가 요즈음 한계가 있지만 시리자나 포데모스에서 나타났음.

- 국제주의는 반세계화, 아랍혁명, 오큐파이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음.

나. 질의응답과 토론

- 드골의 하야에서 볼 수 있듯이 전통적 정치혁명의 관점에서도 반드시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고, 정치세력화의 과제를 어떤 관점에서 제기하는지가 궁금함. 전통적 조직인지 대안적 조직인지?

- 제3세계와 동시성을 이야기했지만, 제3세계는 문화혁명보다 민족해방운동과 정치혁명에 중점을 두었지 않았는가? ===> 동의한다. 제3세계와 영향을 주고받은 동시성은 없었다. 베트남은 소련과 사상적, 물질적으로 의존했다. 68운동은 반전운동으로 지원하는데 그쳤다. 칠레의 경우만 유럽과 유사한 운동 패턴이 나타났다. 아예데의 사회당 좌파.... 제3세계와 68의 관계에 대해서는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68운동이 발생한 배경과 토대를 고찰하고 서술을 전개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냉전질서와 미소의 적대적 공존 같은 것이 배경이었고 68은 결국 냉전거부, 미소 중심질서의 거부였다고 볼 수 있지 않는가?===>  68운동에 대한 일반적 이해에 대해서는 간략히 취급했고 현재적 의의를 중심으로 취급했다. 문화주의 해석 비판과 정치적 해석의 복원을 목표로 했다.

- 포데모스와 시리자를 긍정적으로 서술했는데.... ===> 절대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68혁명/운동의 구좌파의 관료주의 당/노조 운동 도식을 부정하면서 대안을 찾는데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시리자는 사민주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는  한계를 보인다.

- 혁명인가 운동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 운동세력이 혁명을 목표로 했는지 의문이며, 운동으로서는 실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영국의 뉴레프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생태주의 철학, 헤겔주의 테일러의 인정투쟁, 마르쿠제의 페미니즘 등 신좌파의 의제는 68 이전부터 준비되었고 이후에도 영향을 확대했다===> 동의하면서 68혁명/운동이 있었기에 이런 사상들이 물질화될 수 있었다. 68를 통해 지식인 운동이 새로운 청중을 얻었다

 ===> 68은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국가를 통한 혁명 개념을 넘어서 사회, 문화 시스템,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을 의제로 제시했다. 반면 러시아 혁명은 레닌에 의해 국가를 통한 혁명을 추구했고, 마르크스는 국가의 폐지와 국가를 통한 혁명 양쪽에서 모호했다. ===> 레닌이 국가를 통한 혁명을 추구했다는 점은 동의하지만 마르크스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의 교체를 혁명으로 보았고 생산양식 교체는 생산관계의 변혁인데 생산관계는 사회적 관계들이고 국가는 사회적 관계들의 하나로서 마르크스는 분명히 국가의 폐지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보았다. 68혁명을 1848혁명과 비견되는 혁명이라고 했을 때 월러스틴의 의도는 공간적으로 포괄적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세계체제로서 자본주의 성장기였던 장기 19세기에서 1848혁명이 체제에 균열을 내고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을 의제로 제기했다면, 20세기 성숙기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68혁명은 다시 균열을 내고 자본주의 일상, 문화, 사회 전체를  정치혁명과 동시에 혁명하는 의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비견된다고 보았다고 해석하고 싶다.

===>러시아 혁명은 유럽과 더불어 사회주의 혁명을 명확히 추구했지만, 68혁명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68혁명을 과대 평가하고 러시아 혁명을 과소평가한다고 보인다 ===>독일 등의 유럽이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했다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 개량화되었다. 러시아 혁명의 의의에 대한 교과서적 강조를 할 것이 아니라 실제 혁명과정의 역사를 실사구시로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독일 등에서 1918 봉기 등으로 반봉건 혁명의 성과를 냈다.

===> 20세기 초의 러시아와 유럽의 정당들의 강령에서 사회주의가 명기 되었지만 반란하던 대중들은 그때나 68때나 사회주의를 명확히 의식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초의 강령상의 사회주의가 사유재산 국유화와 위로부터의 계획경제 정도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주관적 사회주의와 68혁명의 의제들의 비교에서 러시아 혁명이 더 중요했다는 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68혁명이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 사회를 포괄한 총체적 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성해방의 경우도 68혁명때는 정치혁명과 더불어 혁명과정에서 동시에 제기되었지만, 러시아혁명에서는 동시적으로가 아니라 정치혁명의 성공 후에 20년대에 후속적으로 따라왔다가 스탈린체제에서 봉쇄되었다.

- 구좌파의 정의가 명확할 필요가 있다 ===> 구좌파는 당시 소련의 지배를 받는 공산당과 (지배를 받지 않지만) 아류인 사회민주주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따라 반독점 민주주의연합전선, 평화적 이행론 같은 노선에서 당-노조의 관료적 지배와 의회주의가 관철되었고, 대중의 정서, 운동과는 괴리 되어 있었다 ===> 단순하지만 않다 공산당에서 떨어져나왔거나 제명된 세력들인 마오주의, 트로츠키주의로 있었다. 이들이 구좌파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기존 당-노조 관료주의는 공유했던 측면이 있었던 반면, 68혁명/운동때는 이들이 대안 정치세력으로 나섰고 어떻게 보면 정치적 성과를 전유\하려 하였다. 

- 68혁명에서 페미니즘이 발전했는데, 여기서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적 페미니즘이 분화하고 대립했다.===>한국의 페미니즘은 이런 뿌리를 모르고 급진적 페미니즘이 중심이 되어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적대적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가 비슷한데, 중요한 것은 원래 뿌리가 있었고 같았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다. 

5. 12월 정치경제학연구모임(안내)
 가. 일시: 12월 16일 토요일 오후 3시
 나. 장소: 프닉스 연구실
 다. 주제
   1) 그람시 사상에 나타난 사회변혁과 교육의 관계(곽태진)
   2) 러시아 혁명과 대안 민주주의(하태규)
6. 정치경제학과 송년회(안내)
  가. 일시: 12월 16일 토요일 오후 7시
  나. 프닉스 연구실 인근 명동식당(잠정)

이상입니다.

하태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