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7일 토요일

5월 세미나 결과와 6월 세미나 안내

1. 일시: 5월 20일 토요일 오후 3시-6시
2. 장쇠: 영등포 사무실
3. 주제
  가. 일본의 산업자본의 형성과 정부의 역할(양의모)
    1) 발표 내용(첨부파일 참조)
    2) 토론 내용
    -  일본의 산업자본의 형성과정에서 식민지 수탈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없다 ===> 식민지가 일본경제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소일본제국론"이 있었다. 조선의 식민지화는 경제적 측면보다는 러시아 봉쇄라는 지정학적 측면이 우선적 동기였다. 식민지 지배는 오히려 자본투자의 분산을 가져올 뿐이라는 견해였다. 물론 1930년대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지만 1920년대까지는 이런 측면이 강했다 (===> 이런 견해는 일제 지배가 조선의 일방적 수탈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을 낳았다는 견해의 타당성을 간접적으로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화가 근대화이고 절대선이라는 오해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일제의 지배가 식민지 조선에서 자본주의 발전(노동계급에게 더 심화된 착취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을 무조건 부정하는 민족주의 사학의 견해는 한계가 분명하다)
    - 최초의 자본축적과정이 국가주도라기 보다 민간주도였다는 주장은 상식과 다르다. 좀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 물론 메이지 유신 시점에는 국가의 개입이 중요했다. 하지만 1880년대 재정파탄(이것은 본문에서 설명했듯이 봉건제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국가재정으로 봉건지배계급에게 급여를 준 것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과 또한 외채망국론에 따라 외채의 도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의회는 자유주의 경향이 강해서 재정지출이나 국가의 개입에 일반적으로 반대했다(다만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의 비상시에만 재정확장을 허용했다).
    - 상업자본과 지주자본 vs 중소 제조업자본의 산업자본 형성에서 대비되는역할에 대해 추가적 설명이 필요하다 ===> 예전에는 상업자본이나 지주자본에 의해서 산업자본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학설이 주류였다면, 요즘에는 중소 제조업 분야에서 자체적인 발전에 의해 산업자본화가 이루어진 것이 중요했다는 설로 이전되었다. 필자도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
   - 시초축적의 폭력적 과정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자본은 관계이자 운동의 개념인데, 시초축적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창출되고 착취될 관계가 형성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 이와 관련하여 지조개정 운동이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공유지가 국유지(?)로 되면서 공유지 이용이 불가능해진 농민들이 토지에서 쫓겨나고 프롤레타리아로 되는 과정이 발생했다. 이런 맥락에서 "출가형 노동자"(농업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운 농민들이 계절적으로 노동자로 역할하는 방식?)가 발생했다. 자유민권운동이나 사족반란도 하층봉건지배계급의 몰락을 반영한 사건들인데 시초축적의 노동자계급 창출의 과정이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 사무라이계급의 몰락과정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면 좋겠다 ===> 메이지유신으로 급여가 대폭 줄어든데다가 쌀을 급여로 받았던 중부지방과 동부지방의 사무라이들은(서부지방의 사무라이들은 기타 곡물들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형편이 좀 나았다) 인플레에 의해 쌀의 가치가 하락하여 경제적으로 몰락을 면할 수 없었다.
   - 일본역사를 5단계설에 입각해서 설명했는데, 5단계설은 스탈린주의의 도그마이고 고대노예제 생산양식이 예외적 현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3단계설(원시공산제-공납제-자본주의)이 요즈음에 더 합리적인 견해라고 판단된다. 발표문에서도일본의 노예제가 "국가노예제"라는 식의 표현으로 생산과 잉여의 주요한 창출자로서 노예계급이 실존했다는 주장을 배격하는 것으로 보인다 ===> 문제 제기에 공감하지만 역사를 설명할 때 틀이 필요하기 때문에 편의상 5단계설을 사용하였다.
   - 러일전쟁의 승리요인이 무엇인가? ===> 일본은 자기 동네에서 전쟁을 치룬 반면, 러시아는 원정전쟁이었고, 또한 군사주력이 서구유럽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일본으로 쉽게 집중할 수 없었다. 즉 러시아는 전적으로 전쟁에 집중할 수 없었던 반면 일본은 그랬기 때문에 일본이 승리했다. ===> 다른 견해로서는, 러시아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다는 신화는 러시아혁명을 연구한 저술들에서 반박되고 있다. 러시아 군대는 19세기 전술(기마부대를 중심으로 한 전투방식을 제일로 생각했고 군사학교에서 귀족들의 자제들이 이런 방식의 교육과 훈련을 받았지 현대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에 집착한 반면, 일본은 현대화된 군대였다. 따라서 러시아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 잃어버린 20년의 침체기와 일본의 산업자본 형성과정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가? ===> 90년대 불황에 대한 대응은 국가의 개입 축소를 축으로 한 미국식 경제로 재편이었는데, 아마도 그런 점에서 국가의 개입을 통해 쉽게 회복할 수 있었던 70년대 불황과 달리 장기 침체가 발생했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산업자본의 형성과정과 직접적이지 않지만 간접적, 복잡한 상관관계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일본의 70년대불황과 빠른 회복과 90년대 이후 장기 침체의 비교는 국가의 개입의 차이에서 나타날 수 있지만, 그런 국가 개입의 차이를 낳은 원인은 결국 자본의 수익성의 하락의 정도의 차이 즉 90년대가 70년대보다 이윤율의 하락이 심화되었고(왜냐하면 장기성장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하였을 것이므로) 이에 따라 자본의 투자 보류가 근본원인일 수 있을 것이다(실증 분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설이지만) ===> 일본에서 주거하며 관찰한 경험에 의하면 일본기업들은 수익성보다 시장점유율에 근거하여 투자를 추진하므로 이윤율하락이 직접적 원인이 될지 모르겠다.)
   - 1940년대 전시통제경제를 사회주의라고 표현했는데 사회주의 개념이 부정확한 것 아닌가? ===> 국가사회주의(파시즘)라는 의미였고 오타였다. 
   
   나. 왜 우리는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천주희)
     1) 발표내용(첨부파일 참조)
     2) 토론내용
      - 학자금 대출에 의해 소액채무자가 되면서 대학생들이 채무관계를 어떻게 내면화하는지 즉 자기 통제의 메카니즘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를 설명해주면 좋겠다 ===> 요즘 대학생 청년들은 과거와 같이 전체적 관점과 이슈로 운동을 하기보다 주거, 노동 등 개별적 이슈로 운동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으로 개별화되는 문화가 지배적인데 그래서 "상환불가능성 문화"라고 표현할만한 문화가 있는데, 채무를 상환할 수 없다는 자각에 따라 지출을 줄이게 되고 선배나 친구의 호의도 거절하며 관계단절에 이르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채무관계가 내면화된다고 보인다.
    - 이런 악화된 상황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결국 대학교 무상교육이 필요할 것인데 이를 실현할 방안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가?===> 중요한 주제인데 시간이 없으므로 다음에 별도로 논의하면 좋겠다.
   - 설명한 관점에 대해 이의가 있다. 2000년대 이후 제도의 큰 변화 속에서 부채의 양식이 바뀌어서 기존의 대학학자금은 가족과 친족의 비공식 경제에서 부채를 통해 조달되었다면 2000년대 이후는 공적 신용제도의 확대에 의해 공식적 경제(한국장학재단)에 채무를 지는 것으로 변화되었지만, 여전히 가족 안에서 부담하고 문제를 해소하는 것은 동일하다는 설명에서  이런 변화의 배경은 1990년대 후반이후 대학진학율이 기존 30% 수준에서 70-80%로 대폭 늘어난 것에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 필자의 책과 발표문에서 검토되고 서술되고 있다.
   (- 기타 토론할 내용이 많았으나, 필자의 시간 제약 때문에 토론이 중단되었고, 앞으로 대학생들의 학자금 대출에 따른 금융종속의 문제를 심도있게 연구하고 토론할 필요성을 공감하는 자리로 의미를 새기고 토론을 종료하였음.)

4. 6월 정치경제학연구모임
  가. 일시: 6월 17일 토요일 오후 3시
  나. 장소: 영등포 연구실
  다. 주제: 신청받습니다.